리미널 스페이스, 공포 게임 장르에서 흥행 보증 수표로 거듭나
1980년 작 '샤이닝', "40년 전통 원조 리미널 스페이스 맛집"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복도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뻗어 간다. 양쪽 벽에는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이 반복되는 벽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촘촘하게 나열된 문과 전등만 보인다. 아무도 없는 이곳을 누군가가 걷는다. 카메라는 3인칭 백뷰 시점으로 그의 뒤를 천천히 쫓는다.

최근 쏟아지는 ‘8번 출구’류의 게임 이야기 같겠지만, 아니다.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의 유행보다 한참 앞서 개봉한 영화 ‘샤이닝(Shining)’에 대한 이야기다.

■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공포 게임의 흥행 보증 수표가 되다

지난 해 일본의 1인 개발 게임 ‘8번 출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여기엔 ‘백룸(Backroom)’에서 시작된 리미널 스페이스의 유행이 크게 기여했다. 적은 에셋과 간단한 연출만으로도 기묘한 느낌을 내는 리미널 스페이스는 인디 게임 장르의 흥행 보증 수표로 거듭났다. 덕분에 지금 이 시간에도 리미널 스페이스를 내세운 백룸과 8번 출구의 아류작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이야기에 앞서, 리미널 스페이스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겠다. 여기서 말하는 리미널 스페이스는 일종의 ‘밈(Meme)’으로, “사물의 부재로 인해 위화감을 주는 일상적 공간”을 의미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흔히 볼 수 있는 넓은 실내 수영장을 상상해보자. 하얀 타일과 기둥으로 둘러싸인 수영장에는 각자의 레인에서 물살을 가르는 사람들과 이들을 지켜보는 안전요원, 다른 곳에서 소란하게 친구와 놀고 있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움직임도, 소리도 모두 사라진 이곳에 남은 것은 시야를 가득 메운 백색 풍경과 적막뿐이다. 이렇듯 이질적인 공간에서 오는 뜻 모를 불안감과 기이함이 리미널 스페이스의 특징이다.

■ 게임보다 훨씬 앞섰다… 영화 속 리미널 스페이스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을 뿐, 게임에 앞서 영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1958년 개봉한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Vertigo)’에서 나선을 그리며 이어진 계단을 길게 늘어뜨려 기이한 느낌을 더했다. 이러한 촬영 기법은 ‘현기증 기법(Vertigo Effect)’이라 불리며, 다양한 영화에서 활용됐다.

리미널 스페이스를 가장 잘 다룬 영화는 바로 스랜리 큐브릭 감독의 1980년 작 영화 ‘샤이닝(The Shining)’이다. 그 흔한 점프 스케어 하나 없이, 오직 리미널 스페이스가 주는 공포감을 통해 큐브릭은 세계 최고의 공포 영화 중 하나를 만들어 냈다.

영화는 겨울을 맞아 영업을 중단한 오버룩 호텔을 배경으로 한다. 호텔의 관리를 맡은 주인공 잭과 그의 가족은 거대한 호텔에서 홀로 겨울을 보내게 되는데, 언뜻 호화로울 것만 같았던 이들의 일상은 공포와 광기로 처참하게 무너진다. 호텔에 있던 알 수 없는 힘이 이들을 완전히 미쳐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이 리미널 스페이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숙객이 모두 사라진 공허한 호텔의 로비와 복도, 객실 내 화장실, 거대한 연회장에 이르기까지 장면 곳곳에서 리미널 스페이스만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버르토크 텔러의 ‘현악기,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3악장’의 날선 소리와 어색하리만치 길게 인물에 집중하는 ‘큐브릭 줌(Kubrick Zoom)’이 맞물리면서 긴장감은 더욱 강해진다.

■ “40년 전통 원조 리미널 스페이스 맛집”

단언컨대 리미널 스페이스의 표현에 있어 샤이닝을 뛰어넘은 게임은 없다. 등장인물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듯한 시선을 그려내 영화는 게임 이상의 생동감과 공포감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또한, 영화 내내 불쑥 등장하는 쌍둥이 자매를 비롯해 작중 인물들이 마주하는 모든 환각은 게임 속 이상 현상(Anomaly)을 연상시킨다.

그래서일까. 리미널 스페이스 유행을 알린 8번 출구에서도 샤이닝을 연상시키는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혹은 의도된 부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길게 이어진 통로 너머에서 피처럼 붉은 물길이 맹렬히 다가오는 모습은 샤이닝의 장면과 꼭 닮았다.

정리하자면, 영화 샤이닝은 최근 유행하는 리미널 스페이스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무려 40년도 더 된 작품이니, “40년 전통 원조 리미널 스페이스 맛집”이라는 표현도 과언이 아니다.

리미널 스페이스 장르를 좋아하는 이에게 샤이닝은 반드시 한 번은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서서히 멀어지는 시선으로 마주하는 이질적인 공간의 반복은 게임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기묘함과 광기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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