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개봉작 '나의 마더' 역시 트롤리 딜레마와 유사한 질문 던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맹점... "우리는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철학도인 기자에겐 참 반가운 주제다. 섣불리 입을 열기 어려운 이 숭고한 질문은 문학과 영화, 게임 등 여러 방식으로 어느덧 우리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최근 인터넷 방송에서 화제를 모은 ‘아마겟돈의 광차’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영국의 철학자 필리파 풋이 제기한 사고 실험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를 소재로 한 쯔꾸르 게임이다.

한 번 상상해보자. 당신은 멈출 줄 모르고 빠르게 질주하는 광차(Trolley)의 선로 앞에 서 있고, 당신의 손에는 선로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레버가 쥐어져 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선로 위에는 각각 한 사람과 다섯 사람이 있다. 매섭게 다가오는 광차를 피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당신은 한 사람과 다섯 사람 중 누구를 살릴 것인지 정해야 한다.

이토록 괴로운 선택의 순간을 게임은 우리에게 잇달아 제시한다. 표정은 절로 찡그러지고, 실제로 누가 죽는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죄책감도 느낀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선택의 순간을 고통스러워 하는가?”

■ 광차의 딜레마와 의사의 딜레마… 우리는 왜 고민하는가?

게임 속 선로 위에 놓인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의 가족이고 또 누군가의 친구인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고 또 어떤 일을 저지른 사람이다. 이 모든 게 나름의 가치, 살아야 할 가치를 가진다.

즉 우리의 선택은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행위면서 동시에 두 선택지 이면에 숨겨진 가치를 매기고 이를 저울질해, 합리적으로 더 큰 가치를 취하는 행위다. 이 과정에서 한쪽의 가치를 다른 한쪽의 선택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게 되니, 우리의 고통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잠시 영화 한 편에 시선을 돌려보자. 2019년 개봉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나의 마더(I Am Mother)’라는 영화다. 이 영화 역시 아마겟돈의 광차와 동일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다만 그 형식이 조금 다를 뿐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을 요구한다. 이번에 당신은 각자 다른 장기를 이식받아야 하는 환자 5명을 둔 의사다. 치료가 시급한 순간에 당신 앞에 한 환자가 등장한다. 5명의 환자를 모두 살릴 수 있는 건강한 장기를 가진 위독한 환자다. 이 환자를 치료하면 다른 다섯 명의 환자가 때를 놓쳐 죽게 되고, 환자의 치료를 포기하면 그가 죽은 뒤 그의 장기로 5명의 환자를 살릴 수 있다.

상황만 다를 뿐, 그 내용은 트롤리 딜레마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묻는 질문 역시 동일하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냐는 질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하나를 더 묻는다. “만약 그 한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 공리주의는 차갑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의 맹점

아마겟돈의 광차에서 많은 이용자들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원칙을 선택의 근거로 삼는다. 얼핏 보면 사람 한 명보다는 다섯 명을 구하는 게 더 나은 선택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공리주의에는 그동안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숨은 전제가 하나 있다. 바로 ‘가치의 수량화(數量化)다’다.

공리주의는 선택의 결과가 가진 가치가 공명정대하게 수치로 매겨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 여기서 공명정대하다는 말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치의 측정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무가치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공리주의는 인간을 이루는 모든 관계적 가치를 거부한다. 선로 위에 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인지, 철천지원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사로운 감정을 모두 덜어내고, 오직 그 사람의 ‘쓸모‘만이 선택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탄생과 동시에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맺고, 생애 전반에 걸쳐 이웃, 친구, 연인, 동료 등 그물처럼 빽빽하게 얽힌 관계망을 이루며 살아간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좋은 것은 기왕이면 나와 가까운 이에게 먼저 권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오히려 이를 거부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의 맹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정확하게 매길 수 없으며, 우리의 관계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의 따듯한 마음을 설명하기엔 공리주의는 너무도 차갑다.

영화는 공리주의의 실현을 디스토피아로 묘사한다. 이기심이 낳은 비극으로 종말을 맞은 인류를 대신해 인공지능이 새로운 인류 문명의 재건을 계획한다. 인간을 뛰어넘은 초지능으로 만물의 가치를 정확하게 매길 수 있으며,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인공지능이야말로 공리주의적 판단이 가능한 주체다.

인공지능 ‘마더’는 새로운 인류를 보살필 ‘어머니’가 될 자격이 있는 이타적인 인간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마더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인간은 가차없이 제거된다. 마더에게 인류의 재건이라는 절대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수지타산에 맞는 선택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공지능이 아니다. 그렇기에 공리주의는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이상에 더 가깝다. 그러니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어떤 선택도 나름의 합당한 근거가 있다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렇듯 스스로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트롤리 딜레마의 의미이자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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